🍋 별일 없이 산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어,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지

BuleRatel 2022. 10. 12. 00:11

기다리던 부트캠프 합격자 발표날. 하지만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한테 떨어진 건 두자릿수 대기번호뿐이다. 퇴사 후 6개월동안 부트캠프를 수강하고, 내년 하반기에 취직을 해 있으리라는 계획도 어쩌면 절반쯤 지워진 셈이다. 이전의 나였다면 금방 낙담해서 핑곗거리로 삼았을 테다. 그래도 지금까지 거쳐온 경험에서 뭔가 배우긴 했나보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늘도 약속했던 대로 친구와 공부를 하고 자전거를 50분쯤 타고 돌아왔다. 제법 어른스럽게 말이다.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프랫 인스티튜트의 '캐논 코트야드'

뉴욕에 놀러갔을 때 프랫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대학 선배를 만났다. 1년만의 만남이라 할 이야기가 제법 많았다. 그는 내게 '네가 퇴사를 해서 참 다행이야'라고 했다. 퇴사가 다행이라니, 다들 죽자사자 취직하려고 시간과 돈을 갈아넣고 있는 지금 제법 웃긴 말이었다. 나도 웃으며 받아쳤다.

 

🦡 : 퇴사 안했으면 뉴욕에 와보지도, 새로운 걸 공부해보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 : 맞아, 그래서 다행이라고 한 거야.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걸 알면서도 대단한 결정을 한 거잖아?

 

예측불가능, 내겐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늘 안정적이고 쳇바퀴같은 일상만 살던 나한테는 사실 '퇴사'라는 단어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제법 잘 벌리던 사업도, 전시까지 진행하던 개인 작업도 접어두고 늦은 나이에 석사 유학을 선택하다니. 선배는 늘 생각했던 걸 이루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선배의 말은 이랬다

 

🖥 : 난 사실 프랫이 목표가 아니었어. 1순위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였고, 2순위는 파슨스였거든. 그런데 다 떨어지고 프랫에 온 거야.

🦡 : 그게 아쉽진 않았어요?

🖥 : 아쉽긴 했는데 내가 떨어진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 그래서 예상치도 못하게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여기서 보고 배우는 게 많아. 아마 시카고나 파슨스를 갔다면 그러지 못했을거야.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걸 다 해내는 줄 아는데 생각보다 달성 못한 목표도 많거든. 그냥 뭔가 결정되고 나서 바로 그 방향대로 행동하는 걸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미 주어진 결정에 낙담하지 않고 행동하는 힘, 길을 잘못 들어도 꾸준히 나아가는 힘이 선배의 원동력이었다. '아마 계획한 대로 모두 이뤘으면 난 진작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어 있겠지?' 그는 처음엔 뉴욕에 거주할 생각도 없었다고 했다. 살다보니 이 세계가 마음에 들었고, 이제 뉴욕에 거주하거나 적어도 이곳에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미래 계획을 짜고 있었다. 1순위, 2순위 학교에서 모두 떨어지고 예상도 못하게 브루클린에 살면서, 처음 석사 유학을 결정했을 때의 계획과는 너무 달라졌지만 당장 할 수 있는 방향을 찾고 있었다.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프랫 인스티튜트의 필름/비디오 건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다. 계획에도 없이 인턴 생활을 했었고, 졸업준비위원회에 덜컥 들어가고, 졸업도 전에 취직한 것도, 그렇게 취직한 회사에서 학교를 병행하면서까지 5년 넘게 다닐 줄은 몰랐다. 미국 여행 갈 때도 비 때문에 계획이 몽땅 씻겨나가 비행기를 놓칠 뻔 하지 않았나. 지금도 그런 때다. 비록 부트캠프를 마치고 취직을 하겠다는 계획은 귀퉁이가 부서졌지만 알 게 뭐냐, 싶다. 개인적인 공부는 계속 할 거고 하반기에 약속된 외주 일정도 있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까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만들고 싶은 텀블벅 프로젝트도, 쓰고 싶은 게임 시나리오도 있다. 길 하나를 잘못 들었다고 주저앉아 낙담하는 대신 살짝 튼 길로 계속 나아가는 것, 선배의 원동력을 보고 배우는 날이다.